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과학은 시험 과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리 공식은 공식대로 외우고, 생물은 어차피 다 잊을 거라며 억지로 넘겼다.
그렇게 대학에 가고, 사회에 나와서도 ‘과학’은 늘 나랑은 별 상관없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뉴스에서 AI, 유전자, 기후위기 같은 단어가 나와도 그냥 흘려듣기 일쑤였다.
‘그건 과학자들 이야기지, 나는 그저 문과생일 뿐이니까’라고 변명하듯 넘겼다.
그러다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읽게 됐다.
이 책은 내가 과학에 갖고 있던 선입견을 조금씩 깨트렸다.
꼭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과학이라는 게 이렇게 흥미로운 주제였나 싶었다.
과학이 멀게 느껴질 때, 필요한 건 ‘이해’보다 ‘태도’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과학을 잘 모르고, 심지어 어려워하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글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유시민 역시 과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가 정치, 철학, 사회문제를 다루는 데엔 익숙했지만, 어느 날 자신이 궁금한 것들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결국 과학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시작이 꽤 늦었다는 점에서, 나로선 오히려 위로가 됐다.
과학을 공부하겠다고 선언하는 게 아니라, 그저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서 책장을 넘긴다는 자세가 공감됐다.
‘공부’라는 말이 부담스러울 때, 오히려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그런 순간.
어렵지 않은 언어로 풀어낸 과학 이야기
책은 다양한 과학 분야를 다룬다.
상대성이론부터 뇌과학, 유전학, 진화론, 양자역학까지 꽤 넓다.
그렇다고 어디 하나 깊게 파고들진 않는다.
대신 저자는 자기가 읽고 이해한 만큼의 범위 안에서, 그 과정에서 느낀 생각과 감정을 함께 나눈다.
그래서 설명이 부족해도 부담이 없고, 오히려 ‘나도 이 정도는 느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준다.
예를 들어 상대성이론을 다룰 때,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는 말이 단순한 과학 지식이 아니라 ‘내가 지금 느끼는 시간도 절대적인 게 아닐 수 있다’는 철학적 질문으로 연결된다.
이 책은 그런 식으로 과학을 통해 삶을 다시 바라보는 눈을 만들어준다.
꼭 정답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과학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공부는 마음이 움직일 때 시작된다
책을 읽으며 가장 자주 떠오른 말은 “지금이라도 시작해도 괜찮을까?”였다.
우리는 흔히 공부는 어릴 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고 나선 일과 생계, 인간관계에 치이다 보면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려는 마음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유시민은 60대가 넘어 처음 과학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거창한 동기도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알고 싶어서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늦었다고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그 점이 인상 깊었다.
배움이라는 건, 생각보다 별일 아닌 계기에서 다시 시작되기도 한다.
처음엔 어렵고 낯설어도, 반복해서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이해가 트인다.
그 과정을 유시민은 솔직하게 보여준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다시 붙잡았던 이유도 꾸밈없이 적혀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공부와 나이,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학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나는 내 생각이 얼마나 좁았는지 돌아보게 됐다.
과학은 실험실이나 논문 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거의 모든 일에 과학이 깔려 있었다.
기후 문제, AI 기술, 질병 치료, 뇌의 작동 방식까지 하나도 과학과 무관한 게 없었다.
이걸 모르고 살 수는 있겠지만, 알고 나면 세상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꼭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말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학을 이해하려는 마음,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이 책은 나처럼 문과 감성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 잘 맞는다.
최종 평점: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는 과학을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영영 모르고 살고 싶진 않은 사람에게 좋은 입문서다.
꼭 외우지 않아도 되고,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단지 알고 싶은 마음, 그걸 놓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해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