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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책 리뷰: 고독한 살인자가 마주한 인간의 마지막 질문

by iceviola 2025. 5. 5.

파과

 

한 노년 여성 킬러가 등장하는 이야기.
처음엔 그 설정만으로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과』는 단순한 자극이나 장르적 쾌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살아남는 것과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의 간극, 그리고 늙음과 폭력, 고독을 문학적으로 응축한 깊이 있는 서사다.

구병모 작가는 이번에도 익숙한 듯 낯선 세계를 섬세한 문장과 강한 서사로 직조해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이런 인물은 처음이다’ 싶은 강렬한 캐릭터가 있다.


이름 없는 자의 고독 – 늙은 킬러 ‘경애’

주인공 ‘경애’는 60대 여성이다.
그녀는 외부와 단절된 채 임무를 수행하는 ‘국가 요원’이며, 실질적으로는 은퇴한 킬러다.

그녀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소속도 없다.
과거도 철저히 지워졌고, 지금은 본인의 몸과 ‘기계적인 감각’만을 믿고 살아간다.

그런 경애 앞에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다.
청각장애가 있는 소년.

세상과 단절된 듯 보이는 이 둘 사이에 느슨하지만 명확한 감정의 연결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뭉클하다기보다 불안하고, 따뜻하다기보다 서늘하다.
하지만 그 미묘한 거리감이 이 소설만의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폭력은 기능이 되고, 감정은 장애가 된다

경애는 오랫동안 감정을 버리고 살아온 인물이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지워온 사람.
하지만 늙어간다는 건 어쩌면 그 지워졌던 감정이 다시 스며들기 시작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소년을 통해 경애는 오랜만에 누군가를 ‘지켜야겠다’는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바로 그 감정이 그녀의 기능을 흐리고, 생존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한다.

이 아이러니가 소설의 핵심이다.
폭력 속에서 살아온 자가, 가장 폭력적인 순간에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떠올린다면 그 선택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구병모는 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쉽게 답하지 않는다. 


인간의 윤리는 관계에서 시작된다

『파과』는 말한다.
살아 있는 생명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순간 ‘윤리’라는 틀 안에 들어가게 된다고.

경애가 고립된 존재였을 땐 그녀의 삶은 기능과 생존 그 자체였다.
하지만 타인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인간이 된다.

이 변화는 작고 조용하게 일어나지만, 읽는 내내 강한 파동처럼 전달된다.

고립에서 관계로, 기계에서 인간으로.
그 전환이 가져오는 모든 불안, 애틋함, 그리고 아픔이『파과』라는 제목 안에 함축되어 있다.
파과, 즉 ‘열매가 떨어져 나감’.
이 말이 주는 여운은 책을 덮고도 오래 마음에 남는다.


『파과』는 장르와 문학의 경계를 섬세하게 걷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스릴러처럼 읽히지만, 속도감보다는 밀도에 집중하게 된다.
행동보다는 내면, 총성과 피보다 무표정한 얼굴 뒤의 감정 변화에 더 끌리게 된다.

구병모 작가 특유의 절제된 문장, 불친절하지만 섬세한 심리 묘사, 그리고 완전히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감정의 여백을 남기는 전개가 이 소설을 단단하게 만든다.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그만큼 깊게 남는다.
한 번 읽고 끝나는 소설이 아니라, 여러 번 곱씹게 되는 책이다.


최종 평점: ★★★★★

잔인하지 않은데 아프고, 느리게 흐르는데 긴장되고, 차가운 듯하면서도 뜨겁다.
폭력의 언어로 윤리를 말하는 독특하고 밀도 높은 소설.

오래 남을 한 권이다.